2025년, 나이는 만으로 29살이 되었다. 한국 나이로 치자면 서른이다. 시간이 정말 빠르다는 생각이 든다. 30년 밖에 살지 않은 내가 인생에 대해 논하기에는 아직 너무 젊은것 같다는 생각이 들지만,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듣고, 보고, 경험한 것을 바탕으로 '삶'을 바라보는 관점이 하나 생겼다. 즉, 이건 내 주관적인 '관점'일 뿐이고 '철학'이 아니다. 삶에 대한 관점은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에 '이 사람은 이렇게 세상을 바라보고 있구나' 정도로만 넘어가주었으면 좋겠다.
내가 바라본 '삶'이라는 것은 '나와 세계를 이해하는 과정'이다. 나는 개발자로서 '인간의 삶은 유전자와 세계에 의해 프로그래밍되어 있고, 인간은 체계라는 시스템에 따라 움직이는 것뿐이므로 자유의지는 없다'는 식의 디스토피아적 의견은 선호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완전히 틀린 의견은 아니다. 유전자에 각인된 본능과 욕구, 그리고 세계가 만들어 놓은 법과 규율이라는 시스템, 체제에 의해 우리의 행동이 정해지는 것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은 그저 세계를 구성하는 프레임일 뿐, 그 안에서 변주(Variation)를 만들어내는 것은 오직 인간의 자유의지에서 나온다는 점을 이야기하고 싶다.
'나와 세계를 이해하는 과정'에서 '나'는 세상을 접하면서 내가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 강점과 약점 등을 분명하게 인지하고 '나'라는 사람을 정의하는 과정이다. 이는 '나'라는 존재에 대한 메타인지를 향상시키는 일이다. 아기들도 자기가 좋아하는 음식이 있고 싫어하는 것도 있다. 어린이집과 유치원에서는 마음이 맞는 친구와 그렇지 않은 친구가 생긴다. 초등학교 때는 좋아하는 과목과 싫어하는 과목, 선망하는 직업이 생긴다. 그렇게 점점 '나'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알아가고 정의하는 것이다. 이 과정을 10대와 20대에 거치면 적어도 30대가 되기 전에는 자신이 좋아하는 일과 잘하는 일이 무엇인지를 알고, 하고 싶은 일과 할 수 있는 일, 그 사이에서 길을 찾을 수 있다. 하지만 제대로 이행하지 못하면 크게 방황할 가능성이 높다. 성인이 되어 '나'를 알아보는 과정을 다시 하려면 적어도 초등학생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가서 회고해야 하므로 단기간에 끝나지 않는다.
나는 중학생 즈음부터 다른 친구의 고민을 들어주고 상담하거나 방향성과 전략을 제시하는, 그런 일들을 좋아하곤 했다. '보상을 바라지도 않고, 의도하지도 않았던' 이런 활동들이 나의 '선천적인 성향'을 말해주고 있었으며 20대 후반이 되어서야 이를 인지함으로써 진로의 방향성을 결정할 수 있는 명확한 근거가 될 수 있었다. 지금도 가끔씩 내 전문분야에 대해 멘토링을 하는데 말이다. 스타트업을 준비하고 있는 지금도 '타인의 문제를 해결하고 더 효율적이고 나은 삶을 살 수 있도록 한다'는 그 본질은 변하지 않았다. 난 이제 과거와는 달리 진로에 대해 큰 고민을 하지 않는다. 이미 지나온 과거에서 수많은 힌트를 얻었고, '나'라는 사람에 대한 정의가 점점 쌓이고 나이가 들수록 분명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한 우물을 파는 성향이라는 것도, 명예욕이 있다는 것도, 글을 써서 표현하고 정리하는 것을 좋아한다는 것도, 단순함을 추구하는 실용주의라는 것도, 즉흥적인 것보다 체계를 중시한다는 것도, 능동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좋아한다는 것도, 완성도에 집착하는 완벽주의적 성향이 있다는 것도, 전부 과거를 돌아보면서 깨닫게 된 것들이라 볼 수 있다.
'세계'는 '나'를 감싸고 있는 주변의 모든 요소, 자연과 타인을 이해하고 깨달음을 얻는 과정이다. 다소 있어 보이는 표현을 빌려보자면, 삼라만상의 이치를 깨닫는 과정이다. 학교, 직장, 책, 영상에서 보고, 배우고, 일하는 모든 것들은 세계를 이해하는 과정이다. 스타트업을 꿈꾸는 내게 있어서 이는 '나'의 서비스가 아닌 '세계'인 고객을 이해하려고 하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세계를 이해하다 보면 내가 알고 있는 세계는 그저 점에 불과했다는 것을 깨닫고 새삼 겸손해진다. 때때로 내가 책이나 영상으로만 접하고 머리로만 이해하고 있는 세계와 실제 현실이 다르다는 것을 인지하면 혼란스러워질 때도 있다. 나이를 먹어서도 세계를 이해하지 못하고 '나'를 벗어나지 못하면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인간이 된다. 세상에는 그런 사람이 많다. 자신의 말이 늘 옳은 줄 알고 그대로 이행하지 않으면 타인을 비난하고, 자신이 보고 들은 것이 세상의 전부인 줄 알고 소수의 사례만 가지고 일반화하고 선동하는 그런 사람들 말이다. 자기가 잘못했음을 알더라도 그깟 알량한 자존심을 지키고자 남을 까내리는 사람도 있다.
자신보다 어린 아이의 심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너무 많다. 자신이 아이였던 적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이'라는 세계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내 친구는 아이를 싫어한다고 한다. 그 이유는 울기 때문이란다. 하지만 아이는 원래 우는 것이다. 아이가 울고 불며 떼를 써서 싫다고 한다. 하지만 아이는 원래 떼를 쓰는 것이다. 그게 아이가 세계에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기 때문이다. 이를 이해하면 더는 아이가 울거나 떼를 쓴다고 해서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아이를 쳐다볼 필요가 없다. 그저 어른이 해야 하는 일은, 떼를 쓰는 것보다 더 효과적인 방법인 말과 글, 약속, 계약, 협상, 타협과 같은, 세계에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수단으로 '나'가 아닌 타인의 시선에서 바라보는 연습을 시키고 세계를 이해하는 방법을 가르치는 것뿐이다. 세계를 이해한다는 것은 '나'가 아닌 바깥으로 관점을 확장하는 것과 같다. 이를 통해 타인을 존중하는 법을 배우기 때문에 자신의 감정과 권리만 주장하고 남을 배려할 줄 모르는 파렴치한 인간은 되지 않는다. 하지만 세계를 '잘못' 이해하면 사기꾼이 되거나 주변을 선동하고 가스라이팅을 통해 타인이 인식하는 세계를 왜곡하고 굴종시키는 쓰레기가 된다.
배우를 준비하는 친구가 있는데, 그 친구는 늘 자신의 연기에 대한 방향성을 고민하곤 했다. 하지만 나는 배우라는 세계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섣불리 비전문적으로 조언하는 것은 어리석은 행동임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저 소비자의 관점으로 조언을 해주었다. "대본을 받고 네가 가장 먼저 해야 하는 것은 너('나')의 연기 방향성을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소비자('세계')의 관점에서 그 캐릭터가 어떤 식으로 연기되기를 바라는지 이해하는 게 아닐까?" 그 친구가 이야기하기를, 자기는 그런 생각은 해본 적이 없다고 한다.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었다. 그 녀석은 '나'에서 벗어나질 못하고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 '세계'의 관점으로 생각하는 일이 전혀 익숙하지 않기 때문이다. 늘 자신의 관점에서 캐릭터를 연기하고 표현하려고 했기 때문에 정작 자신이 연기하는 캐릭터를 소비하는 주체인 바깥세계에 대해서는 고민하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세계에서 유의미한 성과를 이룩하기 위해서는 '나'를 벗어난 바깥세계를 들여다볼 수 있어야 한다.
'나와 세계를 이해하는 과정'이라는 것은 그저 개똥철학이 아니라 나름대로 실용적인 내용이다. 나는 실용주의적 성향을 가지고 있어서 이론적으로만 존재하거나 허황된 소리는 싫어한다. 우리가 삶을 살아가다 보면 다양한 사람과 만나고 이별하면서 때때로 예상하지 못한 사건과 사고에 직면하게 되는데, '나'와 '세계'에 대한 이해가 깊을수록 다음과 같이 문제상황에 대처할 수 있다.
- 나에게 맞는 진로를 선택하고 미래를 계획할 수 있다.
- 문제의 본질과 원인을 이해하고 해결하기 위한 초기 계획을 세우고 아이디어를 제시할 수 있다.
- 자기 주관이 확실해지고 옳고 그름에 대한 분명한 기준이 생긴다.
- 타인에게 의존하지 않고 장애물을 스스로 뛰어넘는다.
- 타당성이 없으면서도 그저 감정적으로 공격하거나 호소하는 타인의 의견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다.
- 이치에 맞지 않은 일에는 의문을 품고 쉽게 사기당하지 않는다.
- 자신의 의견을 명확하게 세계에 표출하고, 세계가 원하는 것을 인지할 수 있다.
사실 가장 유용한 효과는 그릇된 의사결정을 하지 않도록 미리 예방하는 것이다. 다른 관점에서 볼 때 삶이란, 늘 선택의 순간을 마주하는 것이다. 한 번의 선택이 인생에 큰 영향을 미칠 수도 있기 때문에 불미스러운 사태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는 선택으로 인해 나타날 수 있는 상황을 짐작할 수 있어야 한다. 뛰어난 사람들은 때때로 그릇된 결정을 하더라도 철저한 준비를 통해 주변 세계를 조정하여 억지로 올바른 결정이 되도록 만들어버리곤 하지만, 사실 더 좋은 것은 그릇된 결정을 되도록이면 하지 않도록 예방하는 것이다.
우리는 '삶'을 왜 살아가고 있을까? 나도 모른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삶의 이유는 개인이 '나와 세계를 이해하는 과정'에서 주체성을 가지고 자신만의 이유를 정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남이 정해주는 것도 아니고, 부모도 아니다. 내가 정한다. 이 시대에 태어난 개개인의 인간은 목적성을 가지고 설계된 도구가 아니다. 처음에는 모르는 게 당연하다. 만약 타의적으로 인간이 처음부터 목적성을 가지고 설계되어 자유를 억압받고 태어난다면, 그거야 말로 디스토피아 세계가 될 것이다. 사람이라면 저마다 가지고 있는 '세계에서 이루고자 하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나와 세계를 이해하는 과정'을 거쳐 '나'라는 존재를 세계에 증명하고 관철하는 것이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는 이유이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