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히 유튜브 쇼츠를 둘러보다가 한 아이의 첫걸음마 영상을 보게 되었다. 엄마는 감격에 겨워 박수갈채를 보내고 있고, 아빠는 흐뭇하게 웃고 있는 모습이다. 아이를 그저 짐으로 생각하고자 하는 온라인 세상과는 달리 때아닌 출산장려 영상에 기분이 좋아졌다. 난 아이들을 정말 좋아한다. 그 어떠한 미래도 만들 수 있는 넓고 빈 도화지를 가진 아이들은 가능성이라는 에너지로 가득 차있고, 때 묻지 않은 순수함이 인간관계와 사회생활에 지친 상처를 어루만져주기 때문이다.
아이는 태어나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자연스럽게 뒤집고, 서고, 걷고, 말을 할 수 있게 된다. 아이의 처음을 함께하는 그 순간 부모는 기뻐하고, 눈물을 흘린다. 내 아이가 성장하는 모습을 보는 그 순간만큼은 부모로서 느낄 수 있는 가장 큰 행복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아이 또한 이러한 부모의 반응을 관찰하고 지켜보면서 더 나아갈 수 있는 힘을 얻는다. 하지만 점차 아이가 나이를 먹으면서 학업과 취업 등의 성과를 요구하게 되고 그 기대치는 커진다. 이러한 부모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는 아이는 자신의 미래에 대한 기대가 없어지고 자존감이 하락하여 밖에 나가길 싫어하고 온라인 세상에만 갇혀 살게 된다. "이 때는 걷기만 해도 박수를 받았는데 지금은..."이라는 댓글이 눈길을 끄는 이유이기도 하다.
사람은 나이를 먹으면서 성장이 더뎌진다. 어릴 때와 학창 시절에는 환경에 의해 성장통이 강요되지만, 성인이 된 이후부터는 인위적으로 고통을 수반하는 행동을 해야 성장하기 때문이다. 성장이란 뭘까? 한 마디로 표현해 보자면, 성장은 '지금까지 하지 못했던 일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성인에게 걷고, 말하는 것은 더는 성장이 아니다. 그저 일상적인 일일 뿐이다. 우리는 일상적인 행위에 대해 박수를 치지 않는다. 하지만 이제 막 태어난 아이에게는 그렇지 않다. 아이가 성장하는 과정에서는 지금까지 하지 못했던 일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이 직관적으로 눈에 보인다. 이 순간 부모는 우리 아이가 성장하고 있음을 느낀다.
아이가 커갈수록 2차 성징과 같은 신체의 변화보다도 더 큰 정신적인 성장이 이루어지고 있음에도 부모는 그 사실을 눈치채지 못하고 아이에게 많은 것을 요구하게 된다. 청소년기에는 꿈에 대해 고민하고, 학교라는 작은 사회에서 희로애락을 겪으면서 자아의식과 지식이 형성되고 인격적으로 성장하여 과거에는 하지 못했던 성숙한 생각과 사고방식을 할 수 있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모는 이러한 눈부신 성장은 그저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괄시하고 칭찬하지도 않으며 알아주지도 않는다. 오히려 머리만 커져서 말이 안 통한다거나 부모한테 못하는 말이 없다고 혼내는 일도 있다. 교육현장에 있는 학교선생이라고 다르지도 않다. 어른들은 그저 학업성적에만 눈이 멀어 성장의 본질과는 멀어지고 정신적인 성장이 진행 중인 아이의 자존감과 행복감만 하락시킨다.
더 큰 문제는 청소년기 이후에 있다. 청소년기에 있는 아이에게 성장을 강요하는 어른이라는 존재들은 아이러니하게도 자신들의 성장은 크게 더디다. 하기에 따라서는 성인도 청소년기에 있는 것처럼 성장할 수 있지만, 드라마틱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성인이 되면 신체적 자유와 그에 다른 책임이 주어지기 때문에 정신적으로든, 신체적으로든, 청소년기에 비해 성장을 강요당하지 않는다. 그래서 나이만 먹고 정신적으로는 청소년기에 머무른 어른들을 많이 볼 수 있다. 이는 살아온 세월과 나이와는 전혀 무관하다. 경력이 곧 그 사람의 능력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 것처럼 말이다.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성장을 강요당하는 것이 싫으면 퇴사하면 그만이고, 최근 나와 같은 세대에게 있어서 퇴사에 대한 거부감이 적어지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성장에는 고통이 수반되는데, 위험을 회피하고 안락함을 추구하는 인간의 생존본능은 성장을 포기하는 한이 있더라도 고통을 회피하는 방향으로 우리를 유도한다. 사실 사람은 과거와 하나도 달라지지 않았다. 선사시대에는 성장을 위해 새로운 도전을 한다는 것은 목숨을 건다는 것과 같았다. 하지만 도전을 포기하면 다치지도 않고 생명에 지장을 주지도 않는다. 그래서 사람은 본능적으로 도전에 큰 거부감을 지니게 되었다. 선사시대와 지금이 다른 점은 도전과 성장을 추구한다고 해서 목숨이 위험하지는 않다는 것이다.
불안과 두려움 없이 그저 편안하고 안락함을 느낀다면 성장하지 않고 있다는 증거다. 더 나아가 미래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이 없는 상태에서 그저 즐기고만 있다면 그건 성장이 아니라 취미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라고 이야기하기도 한다. 성장하고 의미 있는 성과를 거두기 위해서라면 모르는 지식이 있다면 싫더라도 공부해야 하며, 불안하고, 두렵고, 처음 접하는 일이더라도 어색함을 이겨내고 해내야 한다. 그럴 때 비로소 우리는 지금까지 하지 못했던 일을 할 수 있게 되고 성장이라는 가치에 도달한다.
내가 힘을 쏟고 있는 개발자라는 직업은 연차가 큰 의미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여겨지는데, 햇수로 두 자릿수가 되었음에도 개선되고 발전하는 기술에 적응하지 못하고 안주하여 제자리인 사람이 있는 반면 비전공자 거나 저연차여도 눈부시게 성장하는 개발자도 있기 때문이다. 2020-2022년 코로나 창궐시기 개발자 붐일 때 많은 이들이 개발시장에 뛰어들고자 시도할 수 있었던 이유는 낮은 진입장벽과 IT가 가진 미래에 대한 비전, 그에 더해 저연차, 혹은 비전공자라 할지라도 고연차보다 잘할 수 있는 그 가능성과 희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이 간과한 것이 있다면, 바로 성장을 위해 지불해야 하는 고통이었다. 전공자는 바보여서 대학을 나온 것이 아니다.
지금의 얼어붙은 이직시장, 취업빙하기, 과공급으로 인한 지나치게 높아진 신입 개발자의 경쟁률과는 별개로, 개발자의 채용이 활발하게 이루어지던 개발자 붐 시기에 진입하여 아직까지 시장에 남아 커리어를 이어가고 있는 비전공자 개발자는 많이 없다고 한다. 코딩을 한 번도 접해본 적이 없는 비전공자가 전공자보다 잘하려면 당연하게도 많은 성장이 요구된다. 성장을 많이 하려면 많은 양의 공부와 삽질, 코딩테스트, 사이드 프로젝트 등의 고통을 지불해야 한다. 하지만 사람은 고통을 지불하는 것을 본능적으로 회피하려고 한다. 결국, 고통을 이겨내고 시장에 남아 꾸준하게 성장하는 개발자는 점차 희소성을 가지게 된 것이다.
성인이 되어 더 큰 성장을 하려면 고통이 수반되는데도 불구하고 이를 이겨내고 성장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는 이유는, 성장으로 인해 자아실현을 하거나, 혹은 금전적이거나 명예와 같은 실질적 보상이 늘어나는 긍정적인 미래를 기대하기 때문이다. 이는 많은 신입 개발자들이 시장에 진입하는 이유이기도 하면서 떠나는 이유 중 하나인데, 시장을 떠나는 개발자들은 자신이 받고 있는 고통에 비해 그만한 보상이 따라오지 못하고 있다고 느끼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더 나은 미래에 대한 기대는 내가 강의를 만들거나 타인을 가르치고, 책을 쓸 수도 있었던 원동력이기도 한데, 최근에는 그 힘을 많이 잃은 상태다. 이제는 '내'가 아닌 '타인'에게 초점을 맞출 시간이 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최근에 뉴스에서 조명되고 있는 사회적 문제가 있다면 쉬는 청년이 많아졌다는 것이다. 이는 일본에서 먼저 겪었으나 해결이 제대로 되지 않은 국가적 문제인데, 우리나라에도 이러한 현상이 발생하고 있다. 그들은 사회에 나와 고통받으며 성장하는 것보다 편안하고 안락하게 집에서 쉬는 것을 선택했다. 열심히 일하고, 인간관계에서 상처받으면서도 성과를 내는 성장을 거듭해도 받은 고통에 비해 느껴지는 성장 체감, 사회적 인정과 보상으로 돌아오는 가치가 적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실제로 적은 지 어쩐 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들이 그렇게 느낀다면 그런 것이다. 과거의 영광이 무색하게도 안정적인 직업의 대명사로 손꼽히던 공무원의 의원면직이 늘어나는 것도 비슷한 이유에서 비롯된다. 성과에 대한 보상은 고통을 이겨낼 만한 동기가 되는 경우가 많은데, 우리 사회가 그 조건을 충족하지 못하고 있기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아이에게 부모의 칭찬과 인정, 박수갈채가 성장의 원동력인 것처럼 말이다.
우리나라는 선진국이 되면서 GDP 성장률이 크게 떨어졌기에 현재는 80, 90년대 비해 국가적인 성장 체감을 느끼기 어려운 시대가 되었다. 함께 성장하는 느낌, 기여로 인한 보람이 느껴지지 않으면 성장과 일에 대한 동기가 점차 사라지는 것이다. 이 때문에 나와 같은 세대들은 중소기업은 더더욱 갈 동기가 사라지는데, 중소기업에서는 처음에는 금전적 보상이 적더라도 나와 회사가 함께 성장한다는 그 느낌이 있어야 비로소 다닐만하다. 하지만, 국가와 기업이 함께 성장하던 시기에 비해 지금은 그런 경험을 느끼는 일이 많이 없어졌다. 중소기업을 계속 다녀도 기업은커녕 내 미래조차 나아진다는 희망이 보이지 않으니 체념하고 개인의 성장을 완전히 포기하거나, 중소기업은 이직의 발판으로 삼을 뿐 회사와 함께 성장한다는 개념은 점차 사라지고 있다.
정리해 보자면, 성장은 '지금까지 하지 못했던 일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이고 이를 증명하게 되면 성과가 된다. 즉, 성과는 성장의 증거이다. 그런데 성장을 하려면 고통이 수반된다. 따라서 성장의 증거인 성과를 내려면 고통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받은 고통에 비해 성장 체감을 하지 못하거나, 기대했던 성과가 나오지 않거나, 그 성과에 대한 보상이 기대보다 못하거나 그럴 것이라고 예상되는 경우에는 사람들은 그 일을 그만두고 시장을 떠나거나 애초에 시작도 하지 않게 된다. 이는 나도 예외가 아니다. 이 명확하면서도 단순한 결론은 시장에 진입했던 신입 개발자가 떠나게 되는 이유뿐만 아니라 저연차 공무원의 의원면직, 쉬는 청년과 같은 사회적 문제를 정면으로 관통한다.
작년에 안식년을 갖고 개발이 아닌 다른 일로 직무 전환을 시도하고자 미련 없이 블로그의 글들을 모두 삭제하고 떠난 채 1년여의 시간이 지난 지금, '성장'이라는 주제로 다시금 펜을 들게 된 계기는 스스로 성장하고 있다는 것을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도했던 직무 전환은 적성 문제로 보기 좋게 실패하였다. 금전적인 성과는 없었지만 배경지식과 메타인지가 성장한 것은 나름 경사스러운 일이다. 일단 회귀하기는 했는데, 난 지금의 지식과 실력, 이미 과거에 만들어 놓은 약간의 성과에 다소 안주하고 있다. 이는 결과적으로는 과거의 노력으로 인한 성장의 증거로 볼 수도 있겠지만, 현실은 그저 성장이 멈춘 사람일 뿐이다.
20대라는 다시는 오지 않을 소중한 시간을 거치면서, 내가 잘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어디로 나아가면 좋을지, 나는 어떤 사람인지를 알게 되었다. 이 일이 우리나라에서 20대에 해야 할 제일 중요한 일 중 하나가 아닐까? 하지만, 큰 문제가 있다면 불안과 두려움 때문에 공부해야 할 수많은 지식과 앞으로의 새로운 도전은 줄곧 생각에만 머무를 뿐 실천으로 제대로 옮기지는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 내게 주어진 편안함과 안락함을 깨부수고 밖으로 나가지 못하면 영원히 성장하지 못할 것이다. 내년은 20대의 마지막인 만큼, 대미를 장식하고 새로운 도전으로 나아갈 준비를 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