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개발자를 그만두려다 다시 돌아온 이유

정상우 2024. 12. 10. 03:10

2023년 04월에 『어썸 라라벨』 출간을 마치고, 2024년 07월까지 이 블로그에 작성했던 글을 모두 지우고 1년이 넘는 기간을 안식년을 가진 바 있다. 안식년이라고는 하지만, 개발에 대한 목적과 흥미를 완전히 상실하고 개발자를 그만두고 다른 일을 하려고 했을 정도로 의욕이 전혀 없는 수준이었다. 성장체감을 전혀 하지 못하는 상태인데다가 매너리즘으로 인한 목적의식 상실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 변명이긴 하지만 프리랜서라는 환경의 특성상 스스로 채찍질하지 않으면 외부 자극이 적고 동기부여 요소가 거의 없다 보니 더 그랬던 것 같기도 하다. 사실 취업하면 그만인데,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취업했던 두세 번의 회사생활에 대한 나쁜 기억이 사라지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취업에 대한 망설임이 상당했다. 난 대학을 가지 않고 바로 취업을 했기 때문에 19, 20살이던 그 당시, 3년 정도의 짧은 사회생활을 거치면서 사회와 어른들에게 크게 실망했고 회사가 아닌 내 길을 개척하기로 마음먹었던 기억이 난다.

 

코딩을 시작한 지 10여 년이 되긴 했지만, 아직 20대 후반이기 때문에 새로운 길을 개척하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아 안식년을 기회삼아 차일피일 미루어두었던 경제공부도 할 겸 경제/증권 등의 공부를 했었다. 안식년 동안 경제/증권과 관련된 서적을 읽으면서 세상을 바라보는 시야를 넓혔다. 그전까지는 경제에 대해 완전히 문외한이었는데, 지금은 경제신문도 이제는 표면적으로는 조금이나마 이해가 가능해졌다. 개발도 그렇지만 가장 빠르게 성장할 수 있는 방법은 이론으로만 무작정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코드를 작성하고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문제를 마주하고 해결과정을 고민하는 것임을 알고 있기 때문에 이번에도 책으로만 학습하지 않고 직접 원자재/채권/주식/ETF 등 금융시장에 참여하여 그 느낌을 체감했다. 다만 모의투자는 감흥이 없기도 하고 잃었을 때 자기반성도 잘 되지 않기 때문에 바로 실전으로 진행했는데, 슬프게도 엎치락 뒤치락을 몇번하긴 했지만 결론적으로는 손실로 마감했다. 따지고 보면 고작 1년이 조금 넘는 짧은 기간으로 실험한 것이라 단기적으로 바라본 것도 사실이므로 성공을 바라는 것도 말이 안 되긴 한다. 지금에 이르러서는 단기적인 변동성에 너무 흔들리지 말고 글로벌 메가 트렌드에 따라 글로벌 증시에 중장기적인 관점으로 투자하는 것이 나라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더 나은 방법일 것이라고 생각이 든다.

 

경제가 일개 개인이 제어할 수 없는 요인으로 움직이는 경우가 많다는 것도 큰 문제였다. 아무런 힘이 없는 개인은 경제에게 늘 팔로워일 수밖에 없다. 난 내가 스스로 생각하고 타인에 의해 휘둘리지 않으며 주체적으로 판단하고 진행하는 것을 선호하는데, 경제라는 거대한 존재에게는 개인의 의견 따위는 묵살될 뿐만 아니라 관여할 수도 없다.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사느냐 파느냐 뿐이라는 사실이 답답할 뿐이었다. 작문과 코딩같이 내 의도대로 만들고 표현하는 창의적인 일을 즐기는 나로서는 일방적으로 끌리는 입장이 되니 굉장히 불편했다. 투자자의 관점에서는 이미 발생한 경제적 현상에 대해 대응만 가능할 뿐 능동적으로 만들어내거나 바꿀 수는 없으니까 말이다. 시장을 예측하려 들지 말고 예기치 못한 현상이 발생했을 때를 대비하여 계획을 세워놓는 것이 그나마 최선일 것이다.

 

팬데믹/전쟁/정치 등으로 급박하게 변하는 경제상황은 전문가들조차 예측하기 어려운 것이고, 금융시장은 이러한 예측될 수 없는 문제가 실현될 때 민감하게 반응하며 급등락을 반복한다. 급변하는 세상의 흐름을 파악하고 이에 빠르게 대응하고 편승하는 것도 능력인데, 적어도 단기적인 관점에서 볼 때 내게 이런 능력은 없는 것으로 판명되었다. 즉, 단타는 내게 파멸의 지름길임이 증명되었다. 다행스러운 점은 실험적인 시도라는 점과 동시에 다소 방어적인 기질인 내 성격 덕분에 전체적인 손실은 자산의 10% 미만이라는 것이다. 그래도 마음이 아픈 건 어쩔 수 없나보다.

 

단기적인 관점에서 볼 때는 실패하였으나 중장기적 트렌드를 이해하는 능력은 있다는 것을 파악하였다. 2023년 당시 코로나가 진정되면서 경제를 대표할 수 있는 원자재라고 볼 수 있는 구리의 수요가 급증하고 그에 더해 ChatGPT의 등장으로 인해 AI에 대한 인프라와 전력기기 수요가 상승할 것을 대비하여 일찌감치 구리 ETF 및 전력기기 관련주에 투자를 했었지만 그러한 이성적인 판단과는 별개로 너무 단기적인 자극에 예민하게 반응한 나머지 너무 일찍 매도해버리기도 하였다. 또한 개발자였기에 AI가 GPU를 사용하여 학습한다는 것은 이미 대중에게 알려지기 전부터 알고 있었고, 엔비디아가 그 업계 최고라는 것은 수년 전부터 인지하였음에도 너무 단기적으로만 바라본 나머지 행동으로 옮기지 못했다. 즉, 다시 말하면 그저 후회만 가득한 실패자의 변명일 뿐이다.

 

냉철한 자기반성을 하기는 했지만 이 일을 전업으로 삼는 짓은 안 하기로 했다. 내게 있어서는 매일같이 경제 상황이나 뉴스를 보는 것이나, CPI, PPI, PCE와 같은 경제지표로 매크로 환경을 파악하고, 기본적 분석을 위해 PER, PBR, EV/EBITDA 등의 기업지표를 살펴보거나 기술적 분석을 위해 차트를 바라보면서 선으로 그림을 그리는 것은 상당히 재미없고 일에 대한 만족도가 없는 것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거기다 단기적으로 테마주라도 사는 날에는 변동성 때문에 하루하루가 불행했기 때문에 오히려 마이너스였다. 설상가상으로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물가가 요동쳤기 때문에 매 FOMC에서 결정되는 미국 기준금리는 내 스트레스만 가중시키기에 이르렀다.

 

경제공부를 하겠다는 본질은 훼손되고 투자에만 신경을 쏟게 되는 주객전도에 이르게 되니, 더는 안 되겠다 싶었다. 이 불행한 나날을 지속하는 것은 나 자신에게 너무 미안한 것이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내 능력을 더 활용할 수 있고 능동적이며 적어도 재미는 있는 개발로 돌아오기로 하였다. 어쨌거나 배수의 진을 치지 않고 돌아갈 수 있는 탈출로가 있다는 것은 새로운 도전을 하기에 있어서 부담을 크게 덜어주었고, 프리랜서의 특성상 커리어 공백기간에 대한 우려를 딱히 할 필요가 없었다는 점도 한몫하였다. 커리어는 회사를 그만두면서 일찌감치 미련을 버렸다. 투자성과와는 별개로 공부해 둔 경제지식은 적어도 내가 자본주의 국가를 살아가는 한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중장기적 관점으로 글로벌 메가 트렌드에 투자를 할 수도 있고, 달러/금/국채와 같이 비교적 안전자산에 속하는 금융상품에 투자할 수도 있다.

 

다른 일이 아니라 다시 개발자로 돌아오게 된 가장 큰 계기가 있다면 글로벌 메가 트렌드가 IT와 밀접한 관련성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ChatGPT와 같은 LLM이 출현했기 때문이다. 실용성을 중시하는 내게 있어서 생성형 AI는 끝판왕에 가까운 수준이고, 이는 ChatGPT로 현실이 되었기 때문에 다시 개발자로 돌아오기에 충분한 동기부여가 될 수 있었다. ChatGPT 등장 이전의 AI는 복잡한 이론과 모델 개발과 같이 연구에 치중된 터라 나랑은 꽤 동떨어져 있어서 멀리하고 있었는데, LLM의 등장 이후부터는 사용자 경험의 혁신과 같이 더 큰 사회적 가치를 창출하고 기존의 서비스와 프로세스를 개선하고 효율성을 증대시킬 수 있다는 것이 다수의 기업들로부터 입증되었고, 사업적 측면에서도 웹과 모바일에 이은 새로운 생태계라는 기회의 땅이라는 점에 큰 매력을 느꼈다. 아이러니하게도 ChatGPT 출시 당년에는 IT업계뿐만 아니라 금융시장에서도 큰 화제였기 때문에 간접적으로나마 그 분위기를 인지하곤 있었다.

 

애플리케이션 레벨이라고는 해도 초보인 이상 기술적으로 새로 배워야 하는 내용이 많기는 하지만, 아무튼 다시 개발이 즐거워졌기 때문에 딱히 상관없어졌다. 게다가 단기적인 목표도 생겼는데, 일단은 간단한 AI 애플리케이션을 만들어보는 것이다. 과거의 경험을 토대로 경제와 관련된 도메인으로 만들어보는 것도 괜찮을 수도 있다. 할 수 있는 일은 무궁무진하기 때문에 아이디어를 고민해보고 있다. 이는 단순히 ChatGPT API에 요청을 보내고 응답을 받는 것뿐만 아니라, 미리 학습된 프라이빗 모델을 파인튜닝하고 셀프 호스팅하는 과정을 포함한다. 일반적인 웹 서비스를 만드는 학습할 때와 마찬가지로 처음과 마무리를 경험하면서 밑바닥부터 다지는 일은 여러모로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그에 더해 올해인 2024년 3분기 즈음부터 선구자들에 의해 LLM에 대한 실용적인 책들도 나오기 시작했다. 나는 그저 패스트 팔로워로써 지금이 시작하기에 가장 적기가 아닐까 생각한다.

 

새로운 기술과 관련해서 지금은 삭제된 글이지만, 2020년 회고에서 2021년에는 블록체인을 공부하겠다고 선언하고 Go 언어부터 공부했던 기억이 있다. 그 당시 블록체인은 기존의 통화체계를 혁신하고 새로운 금융 생태계를 만들 수 있을 정도의 파급력을 가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었다. 기술적으로는 초보적인 수준이었지만 Go를 사용해서 비트코인 논문을 살펴보면서 블록체인 메인넷 프로토타입을 만들어보고 공부했던 기억이 난다. 블록체인을 공부하고 관련 기업의 입사까지도 목표로 잡았었던 시기다. 하지만 블록체인에 대한 공부는 결국 6개월 만에 멈추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기술적인 호기심은 있었지만 실용성에서 큰 의문을 가졌기 때문이다. 게다가 블록체인에 대한 대중의 인식이 코인으로 인해서 너무 도박적인 방향으로 물든 것도 문제였다.

 

암호화 알고리즘으로 공개키 기반구조의 키페어를 만들고 해시로 지갑주소를 만들거나 트랜잭션을 처리하고 코인을 발행하기 위한 작업증명과 같은 것을 구현하는 일은 기술적으로 꽤 흥미로웠긴 하지만 여전히 기술의 실용성이라는 의문과, 블록체인하면 코인이 떠오르고, 코인하면 투기가 떠오르는 것이 보편적인 인식이라는 것이 블록체인 공부를 계속하게 하는 것에 있어서 큰 망설임을 만들게 되었다. 그나마 이더리움 스마트 컨트렉트에서 희망을 보기는 했지만 여전히 미심쩍기는 마찬가지였다. 다만 기술은 꾸준히 진보하는 만큼, 수년이 지난 지금은 어떨지는 잘 모르겠다. 지금까지 공부했다면 틀림없이 기업에서 일하고 있었겠지만 후회는 없다. 기술에 대한 개인적인 호기심, 실용성, 대중의 인식은 내가 새로운 기술을 배우는 것에 있어서 중대한 의사결정 지표인데, 두 가지나 불합격이었으니 어쩔 수 없다. 그래서 결국에는 블록체인 공부를 중단하고, 때마침 출판사에서 요청이 들어왔던 2021년 6월부터 2년간의 라라벨 책 집필 여정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지금은 LLM 공부를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햇병아리에 불과하고, 실험적인 시도이기 때문에 장대한 목표가 있는 것도 아니다. 다만, AI는 블록체인과는 다르게 기술적 호기심, 실용성, 대중의 인식이라는 내 개인적인 세 가지 요건을 모두 충족했을 뿐만 아니라 글로벌 메가 트렌드에도 포함되기 때문에 이어나갈 가능성이 크다. 또한 AI는 그 효용이 가시적으로 드러나고 있기 때문에 단기적인 유행으로 그칠 가능성은 희박해 보인다. OpenAI를 비롯한 애플, 메타, 구글, 아마존, 마이크로소프트 등의 빅테크들이 경쟁적으로 AI 모델과 솔루션을 공개하고 있기 때문에 다소 과열된 느낌이 있긴 하지만, 열기가 식더라도 수요는 유효할 것으로 생각된다. 블록체인 또한 미래에는 AI가 메타버스에 도입되고, 메타버스에서 경제생활을 영위하는 사람이 늘어날수록 디지털 화폐가 필요하기 때문에 기술의 가치가 증대될 것임은 분명한데, 일단 지금은 개인적으로 더 흥미로워 보이는 것으로 먼저 해보기로 했다. LLM은 내가 개발자로서 다시 활력을 되찾고 돌아오게 된 계기인 만큼, 다시 미래를 향한 새로운 도약이 되었으면 한다.